<특집>소양강댐 준공 50주년③ 소양댐은 콘크리크댐으로 시작

기획·특집 / 왕보현 기자 / 2023-10-16 08:47:00
- 경제개발의 시작
- 전력용이냐 다목적용이냐
- 콘크리트댐이냐 사력댐이냐
- 높이 123m, 길이 530m, 체적 960만㎥의 다목적댐

[티티씨뉴스=왕보현 기자]

▲ 소양강댐은 당초 콘크리트중력식댐으로 계획되었다. 1960년 미국의 토목회사인 스미스 힌치먼 앤 그릴스(Smith, Hinchman & Grylls)에 의하여 현지조사가 이루어졌으며, 당초 제안된 형식은 108m의 콘크리트 중력댐이었다. 1962년 11월 건설부는 일본 공영과 소양강댐 기술조사 및 설계 용역을 체결하였는데 콘크리트 중력식이 무난하다는 고찰이었다. 1967년에는 건설부가 한강유역 합동조사단의 건의에 따라 높이 122m의 중력댐을 검토하게 되었다.(사진은 콘크리트중력식댐으로 그려진 소양강다목적댐 조감도 현재의 모습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소양강다목적댐사업은 한국전쟁이 끝난 1950년대 초부터 기초조사 및 검토가 이루어졌다. 서울을 비롯한 수도권의 용수공급이 절대적으로 필요함에 따라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의 일환으로 실시됐다. 건설부는 1967년 4월 15일 소양강다목적댐 건설에 착수했다. 그리고 한국수자원개발공사가 1968년 1월 위임하여 사업을 수행 했다. 

▲ 강원도 오대산에서 발원한 소양강은 남쪽으로 물줄기를 이루며 흐르다가 춘천 북방에서 북한강과 합류하는 최대 지류로, 유로연장이 166.2km에 달했다. 1968년 촬영된 소양강댐 착공전 전경

강원도 오대산에서 발원한 소양강은 남쪽으로 물줄기를 이루며 흐르다가 춘천 북방에서 북한강과 합류하는 최대 지류로, 유로연장이 166.2km에 달했다. 유역면적 은 2,703km로, 강원도 인제 고성· 양구. 홍천. 춘천 등이 강 좌우에 펼쳐져 있었다. 소양강과 북한강의 합류시점에서 12km 떨어진 소양강 계곡이 소양강다목적 댐 건설 적지로 확정됐다. 사업비는 내자 203억 1,500만 원, 외자 117억 7,000만 원. 총 320억 8,500만 원이 들어갔다.
▲ 1968년 3월 

처음 설계를 할 때 콘크리트 중력댐으로 계획했으나 당시 우리나라의 건설자재 생산능력으로는 철근·시멘트 등의 공급이 어려워 콘크리트 중력댐 공사를 수행하기 곤란하다는 평가가 나왔다. 또한 시공지역이 산간벽지여서 자재를 수송하는 데 막대한 비용이 들며, 댐이 포격 등으로 인해 파괴될 경우 수도권지역이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주변에서 쉽게 재료를 구할 수 있고 외부 충격에 강한 사력댐(Rock Fil Dam)으로 설계를 변경하기로 했다.
▲ 1969년 3월

중앙일보 1992.06.19. 일자 "다목적이냐 경부고속도 발전용이냐" 기사에는 “소양강댐 건설사업의 시공사 대표인 정주영 국민당 대표는 자신의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서 “소양강댐을 한국최초의 사력댐 방식으로 건설한 것이 자신의 아이디어”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후 이 사실이 정설처럼 회자 되었지만 소양강댐 공사 당시 수자원개발공사 사장으로 댐 공사를 주도했던 안경모씨는 이 자서전 내용에 대해 “한마디로 거짓말”이라고 부인한다.“고 보도했다.
▲ 1969년 3월 소양강댐 건설에 소요되는 각종 장비와 비품 및 소모품도 일일이 점검을 했다. 뒤줄 오른쪽에서 두번째가 안경모 사장

 

이 기사에서 안경모 사장은 “현대건설은 사력댐 방식으로 한다는 방침이 다 결정된 뒤에 입찰했다”면서 “ 일개 업체가 그런 결정에 관여할 수 있었겠는가”고 이의를 제기했다. 그러면서 “설계를 맡은 일본공영이 두 가지 방식 중 콘크리트방식이 더 낫다고 권한 것은 맞다. 그러나 수자원공사가 사업 주체로 결정된 뒤 일본측과 현지조사를 새로 했다”면서 “강바닥의 모래와 자갈을 활용해 사력댐을 만들면 공사비의 15∼20%를 절감할 수 있겠다 생각했고, 사력댐은 중심부에 단단한 점토가 들어가야 하는데 점토 역시 공사예정지의 상류 4㎞지점에 많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 1969년 10월

 


안경모 사장은 “사력댐 방식으로 최종 낙착된 것은 경비절감과 콘크리트댐으로 할 경우 시멘트 수송의 어려움, 그리고 안보상의 이유(댐이 폭격 당해도 사력댐은 조금 파일 뿐 금이 가지 않음) 등 세가지 여건 때문이었다”고 강조했다.
그는 “공로다툼같이 비칠까봐 조심스럽지만 어쨌든 사실은 사실이다.”고 말한다. 댐건설의 책임을 맡은 수자원개발공사가 결정해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사력댐으로 시공된 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 1970년 1월 본댐그라우팅 혹한기 계속 공사를 위해 가설건물을 설치해 보온늘 유지했다.

 

▲ 1970년 3월 상류코퍼댐 코어다짐공사

이와 같은 내용은 안경모 회고록 “지도를 바꾸고 역사를 만들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 1970년 10월 코퍼댐 체절 왼쪽에 안경모 사장 모습이 보인다.

소양강다목적댐 공사는 준비공사, 가배수로공사, 물막이 공사를 거치 본댐 공사에 돌입했다. 본댐의 축조(築造)공사 역시 가물막이 공사와 마찬가지로 댐 기초굴착 공사, 기초처리공사, 댐 성토공사 순으로 진행했다. 본 댐 공사는 1969년 10월 24일 기초굴착공사를 시작하였고 댐의 성토공사는 1970년 5월 1일에 착공하여 1972 년 11월 10일 완공했다.
▲ 1971년 1월 혹한기 장비점검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 건설업체들은 여건이 열악해서 댐을 건설하는데 필요한 장비가 제대로 갖추어져 있지 않았다. 수자원개발공사는 차관을 들여 건설에 필요한 장비를 구입해, 건설업체에 대여해주는 형식을 취했다. 이때 13.5톤급 덤프트럭 127대. 32톤급 덤프트릭 20대 등 댐 공사에 필요한 68종의 총 205대 건설 장비를 차관으로 들어와 공사 현장에 투입했다. 일본에서 들어온 이 장비들은 무상 대일청구권자금으로 100% 현물 차관이었다.

다목적댐 공사는 홍수와의 싸움이었다. 소양강다목적댐을 건설할 당시 제2호 가배수로가 개통되기 이전에 홍수가 들이 닥치는 위기에 처한 적이 있었다.
▲ 1972년 본댐 코어 현장 검사

홍수로 갑자기 들이닥친 '물을 제1호 가수로를 통해 흘려보내야 하는데, 너무 수량이 많아 본댐이 무너질까 노심초사했던 경험을 겪기도 했다.

완성된 소양강다목적댐은 높이 123m, 길이 530m, 체적 960만㎥의 규모였다. 이로써 연 12억㎥의 생활 및 공업용수를 수도권지역에 공급하고, 수도권지역에 연 3,200만㎥의 농업용수와 한강 하류에 연 2억 5500만㎥의 하천유지용수를 공급할 수 있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연 5억㎥의 홍수를 저류하여 인명이나 재산 피해를 방지하는 효과도 있었다.
▲ 1971년 6월 발전소 펜스톡 현장 조립공사

소양강다목적댐의 수도권 용수공급량은 전체의 45%에 달할 정도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으며, 1978년을 포함해 다섯 차례의 전국적인 가뭄에도 수도권에 안정적으로 용수를 공급하는 역할을 해오고 있다.
▲ 1971년 10월 본댐 여수로 공사

 

▲ 1972년 본댐 여수로

발전소는 소양강다목적댐 우안 직하부의 지상에 설치되었는데, 낙차 90m에 사용 수량은 초당 251㎥이다.
▲ 1972년 6월 본댐 코어검사가 현장에서 이루어 지고 있다.

 

▲ 1970년 6월 발전소 암반굴착

발전소는 암반까지 굴착하여 그 위에 2대의 발전기를 정치했다. 이 공사는 기초굴착작업을 1970년 4월 중순에 착공, 1973년 11월 1일 발전소설비 공사를 완료했다 발전용량 10만kW인 발전기 2대로 시설용량은 총 20만kW이며, 상시 최대출력은 15만 9,500kW, 연간 발전량은 353GWh에 달했다. 이는 수도권 33만 인구가 사용할 수 있는 전력으로, 심각한 전력난을 겪고 있는 상황에서 전국 수력발전 총량의 3분의 1 정도를 분담해 전력난 해소에 크게 기여했다.

▲ 1972년 2월 소양강댐 담수개시

 

▲ 1973년 3월 발전소 회전자 정치

또한, 콘크리트 중력댐 대신 사력댐으로 변경하여 공사를 마침으로써 약 10% 정도의 건설비를 절약할 수 있었다. 그리고 소양강다목적댐 건설에 사용한 대형장비는 그 이후 안동다목적댐 건설과 대규모 산업기지 건설 사업에도 계속해서 사용함으로써 다른 공사의 건설비용을 절감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되었다. 소양강다목적댐의 축조로 형성된 거대한 인공호수는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함께 관광지 및 휴양지로 이용되며, 내수면 어업개발과 유람선 운항 등으로 지역정제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 1973년 7월 위용을 드러낸 소양강다목적댐

[ⓒ 티티씨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뉴스댓글 >